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 Croiser.

그라함은 눈앞의 의사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그의, 벌써 몇 수십 차례나 되어가는 재생 캡슐을 이용한 치료 권유는 이제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유니온 시절부터 그라함을 알아온 의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다른 군의관들과는 달리, 어로우즈 원 맨 아미인 그를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다른 어로우즈 부대원들이 그라함에게 갖는 껄끄러운 기색도 없었다.

미스터.”

의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라함을 불렀다. 이 기묘한 대치도 벌써 몇 번 째 인지, 그 횟수를 셀 수 없었다. 4년 남짓한 시간동안 의사는 그라함이 재생 캡슐을 이용한 치료에 대한 권유를 멈추지 않았고, 또 설득에도 무던한 정성을 들였다.

이대로라면 그는, 10년도 채 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의 몸이 여기까지 버텨주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흔히들 말하는 정신력이라는 것일까. 의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단말에 뜬 그라함의 정기 검진 결과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좋아질 일이 없었다.

그의 몸은 구 국련 주재의 폴링 엔젤 작전이 펼쳐지기도 전에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몸으로 폴링 엔젤 작전에 참가했고, 그로 인해 그의 몸은 완전히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어 버렸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이미 헤져 조각이 난 천을 정신력이라는 실과 바늘을 이용해 겨우나 기워놓은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정신력이라는 것을 그리 믿지 않았던 의사는, 그라함의 몸 상태와 그의 현재를 보며 정신력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일 없는 저 몸으로 아직까지 군인을- 그것도 어로우즈의 원 맨 아미를 해먹을 수 있다는 것이 정신력이 아니면 무얼까.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이미 몇 번이나 거절 했을 텐데.”

허나 미스터, 이대로라면 MS의 운용은커녕,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올 겁니다. 아니, 이미 오고 있을 텁니다.”

의사의 말에 그라함이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는 양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라함의 양에 의사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보통 다른 군인들은 군의관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즉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할지라도 재생 캡슐에 들어가겠다고 할 텐데, 그라함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다. 그라함이 그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는 것쯤은.

그러나 의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대체 그가 왜,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뒤틀려 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있을 터였다. 이렇게 뒤틀리고, 일그러져서, 망가져 가는 그를 보며, 그를 위해 슬퍼하고, 위로하며, 사랑해 줄 누군가가. 그의 목숨이 스러지면 그 누구보다 슬퍼 할, 그만을 위한 누군가가, 반드시.

의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라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재생 캡슐을 이용한 치료가 그리 귀찮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누워 있으면 그 뿐, 눈을 뜨면 끝날 뿐인데 대체 왜 그런 고집을 피우시는지, 그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면, 저도 미스터를 설득 하는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그라함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곁에, 그녀가 없다. 그 하나만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한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제 몸 따위가 다 무어란 말인가. 그녀가, 세츠나가, 자신의 하얀 천사가 곁에 없는 지금, 이곳에, 이 의사의 맞은편에 앉은 것은 미스터 무사도라는 텅 빈 껍데기일 뿐인데.

그라함이 짙은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재생 캡슐 안에서,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어야 하지?”

의사는 섣부른 희망을 갖지 않았다. 텅 비어 공허하게만 보이는 녹색 눈동자가, 그가 여전히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최저 3개월에서, 최대 반 년 정도입니다.”

그라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다. 제 몸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 같은 몸. 이미 그녀와 함께 살 때마다 그녀 몰래 피를 토했던 몸이었다. 하지만…….

최저 3개월이라는 소리가 마치 그녀를 포기하라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카타기리 사령관의 성격이라면 자신이 잠들어 있을 3개월 안에 셀레스티얼 빙과 결착을 맺으려 들 터.

단호히 사양하지. 어깨에 동력이 둘 달린, 그 하얀 건담은 내 몫이야.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일세. 결코 타인에게 넘길 생각은 없어!”

그라함의 말에 의사가 아연실색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건담에게 지나칠 만큼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알고 있었다. 유니온 시절, 그가 건담에게 오랜 전우와 은사를 잃은 것을 알고 있는 의사는 그의 그런 집착이 원한의 탓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허나, 이건. 이 집착은…… 대체, 무엇 때문에 피어난 집착이지?

건담, 따위에게목숨을 내다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 순간, 그라함의 눈빛이 변했다. 광기는 있었어도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마치 얼룩이 지듯 광기가 번져 나갔다. 눈동자가 마치 불꽃이 튀듯 탁하게 일렁이는 양에 의사가 무언가를 느끼고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라함은 무릎위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의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애초에 누군가가 알 리가 없었다. 어로우즈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른다.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제 감정도, 자신과 그녀의 사이에 있었던 일도. 유일하게 그녀를 본 적 있는 카타기리조차, 그녀가 건담의 파일럿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눈앞에 있는, 아마도 분명 어로우즈와는 상성이 맞지 않아 고생하고 있을 사람 좋은 의사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지.

건담 따위, 라고?”

그러나 그라함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잔뜩 노기 띤 목소리.




물론 저 대목 부근을 쓰면서 저걸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저걸 의사의 대사로 친것은 의도했던 점이 아닙니다...
진짜야, 믿어주세요ㅠㅠ